북한과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 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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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이후 자유로운 몸이 되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38선을 경계로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킨 것은 한반도만이 아닌 소련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문제였죠. 신탁통치안 합의와 함께 당시의 남측과 북측의 정치 이견은 남북한의 분단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남북한의 체제는 수시로 봄과 겨울을 오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정식 수립되어 다른 나라로 살아온 이후 북한과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 사건 5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1.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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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 18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던 판문점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30여 명이 넘는 조선인민군이 주한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그 외의 주한미군과 대한민국 국군들에게 부상을 입혀 이른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의 발단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였는데요. 당시 남북 공동경비구역에 심어져 있던 미루나무의 뻗은 가지들은 남한의 시야 확보에 영향을 주었고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니 보니파스 대위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자르는 전지작업을 명령, 실시하였습니다. 남한과 주한미군 측의 전지작업이 못마땅해서였을까요. 박철 중위를 포함한 조선인민군은 작업을 즉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우리측이 작업 중지 재요구를 거부하자 조선인민군들은 곡괭이, 도끼 등을 가지고 와 주한미군과 국군에게 휘둘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서 보니파스 대위를 비롯한 주한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생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도끼만행사건 이전만 하더라도 조선인민군과 주한미군 그리고 국군은 판문점 구역 안에서 자유로이 드나들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남북 양측은 두꺼운 콘크리트 장벽의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남북 이산가족 최초 상봉: 1985년

Image Credit: 남북이산가족찾기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대한민국 정부 웹사이트)

1950년 6월 25일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 습격으로 인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6·25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멈추지 않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해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일단락되었는데요. 당시에는 임시적인 “휴전” 협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슬프게도 그 협정은 분단과 이별의 아픔을 가지고 현재까지도 진행형입니다. 문제는 북한의 기습 습격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기에 가족, 연인 간 생이별을 하는 경우도 셀 수 없을 만큼 빈번했다는 것입니다. 남한정부를 비롯한 온 국민은 1975년 “도끼만행사건” 이후 북한의 만행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생사도 알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이산가족을 위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남북 이산가족 실태를 확인, 그리고 이산가족찾기운동을 계기로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최초 상봉”에 성공하였습니다. 다음의 글은 소설가이자 시인 ‘고호’의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우레와 같은 폭탄이 떨어지던 날
굉음 속에 엄마 잃고
누이의 고사리손 우습게 놓쳐 버렸다
술에 절은 아버지는 누이를 만난다며
봄볕 좋은 날 서둘러 가시고
홀로 억지로 붙인 이 목숨
이제사 너를 만난다니
구차히 살아온 보람이 아니겠느냐
예닐곱 먹던 젖떼기와 헤어지기 전날
비석치기하다 자빠트린 것이
팔십 평생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보자마자 이마에 흉터부터 보자 했다
고사리 같던 손은 고목나무가 되고
포동포동하던 젖살은 그 옛날에 빠지고 없어
여기 폭삭 늙어 뵈는 할머니가 내 누이라 하네
유독 매서운 겨울을 지나
애달픈 아리랑 고개를 넘어
이제야 왔구나 이제야 만나는구나
기가 차서 두 손만 썩썩 비빈다
이북은 여그보다 춥담서
오래전에 사둔 장갑 손에 찌워주고
어떻게 핏줄은 낳고 살았는가
낯선 조카들을 보니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헤어지지 맙시다 다신 헤어지지 맙시다
다 늙은 것이 애마냥 옷고름을 적신다
죽지 말고 기다리라고
내년 지 생일날 꼭 다시 보잠서
살아만 있으라고”

고호 –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

3. 금강산 관광 합의: 198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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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나운영 작곡가가 작곡하고 강소천 작사가가 사한 동요 <금강산>입니다. 금강산 투어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금강산의 경관은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비경으로 꼽힌다”라는 말인데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강원도 금강, 고성, 통천군에 걸쳐있는 금강산은 예로부터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예술가, 시인들의 빈번한 주제가 되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금강산 관광 개발에 대해서 첫발을 내디딘 건 다름 아닌 현대그룹 창업자 고 정주영 회장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정주영 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당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북 햇볕 정책”에 걸맞은 취지로 통일 소 500마리를 가지고 북한을 방문하여 금강산 관광 개시를 위한 남북 협력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긴 노력 끝에 남한은 금강산을 해로, 육로를 통해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국민 누구라면 금강산의 땅을 직접 밟으며 수려한 경관을 관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북한의 냉전, 전염병 사스 사태, 민간인 민영미 억류사건과 2008년에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과 같은 다양한 이후로 금강산 관광이 잠정 중단되기도 하였습니다.

4. 북측의 연평도 포격 도발: 2010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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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발은 앞서 일어났던 “도끼 만행사건”에서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북한이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웅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북한의 공격에 대응 사격을 하던 대한민국 육군과 해병대원과 더불어 민간인 부상자와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는데요. 인명피해와 더불어 재산피해까지 발생한 이 사건은 6.25 전쟁과 휴전협정 이후 최초로 발생한 민간인 피해 사건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격 이후 북한은 자신들의 군사 기습 공격은 정당했으며 전적인 책임은 우리나라에게 있다며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5. 남북 정상회담: 2018년 3월 29일

Image Credit: 남북 정상회담 (대한민국 정부 웹사이트)

2018년 4월 27일 우리나라 시간으로 9시 29분 북한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우리나라의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2018 남북 정상회담은 “평화, 새로운 미래”라는 표어를 가지고 남한 측에서 이루어졌는데요. 남북정상회담의 일정은 예상외로 간단한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두 국가 정상은 만난 날 오전에 100분가량이 되는 오전 회담을 가졌으며, 개별 만찬을 가진 뒤 소나무에 각자가 챙겨온 흙과 물을 뿌리는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뒤 이루어진 남북공동선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공동목표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기쁨을 표하기도 했죠. 이후 환영 만찬에서는 남한이 북한의 평양냉면 전문점으로부터 제면기를 직접 공수해와 평양냉면을 만들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날은 비록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양쪽 국가 정상이 만난 행사였지만 미래에는 누구나 북한에서 점심 또는 저녁으로 평양냉면을 즐기는 그 날이 서둘러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