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돌아다니기도 선뜻 내키지 않고 여행도 가기 힘든 이 시국. 각 나라 느낌이 물씬 배어 있는 영화 특집을 홍콩편으로 시작한다. 아래 소개되는 세 편의 홍콩영화는 소위 MZ(밀레니얼+Z)세대에게는 낯설지만 오히려 그들의 부모님 세대에 유행했던 영화들이다. “그 시절” 레트로 느낌이 물씬 나며, 세계에 아시아 영화를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던 홍콩 영화 세 편을 통해 그 시절 감성에 젖어보길 바란다.
1. 중경삼림(Chunking Express, 1994)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은 1990년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연애영화입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곧 사랑하게 될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막 헤어진 사람들이 마치 치료하듯이 보아야 할 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왕가위 감독의 대표 청춘물이라 할 수 있는 <중경삼림>은 많은 사람들이 왕가위 영화를 좋아하게 된 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화 스타일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당대의 명배우인 왕페이, 양조위, 임청하, 금성무가 주연으로 등장하며, 두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는 특이한 영화 구조를 보여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이별을 겪은 남자가 정체불명의 여자와 점점 가까워지며 사랑을 찾아 헤매는 청춘들의 이야기란 점이다.
비슷한 스토리를 두 에피소드는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풀어간다. 그래서 <중경삼림>을 보고 나면 마치 두 개의 다른 영화를 한 번에 본 느낌을 선사한다. 어쩌면 옛날 멜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느끼한 대사들이, 홍콩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중경삼림>을 본 사람이라면 [The Mamas & The Papas – California Dreamin’]란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이 영화가 생각나는 마법을 보여준다. 25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감각적인 영상미와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중경삼림>은 마치 스토리보다 카메라 앵글, 영상 전반에서 보여주는 인상적인 색조와 음향에 중점을 둔 영화라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각각의 장면과 그 속에서의 분위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한 인상을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와 같이 단순하지만, 서정적인 이야기에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보고 싶다면 이 영화 <중경삼림>을 추천한다.
2. 첨밀밀(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
“월량대표아적심 (月亮代表我的心) – 첨밀밀 OST”
1950년대부터 이 영화 첨밀밀이 개봉하던 1990년대까지는 홍콩영화가 아시아 영화 시장 부동의 강자였다. 이처럼 느와르, 로맨스, 스릴러, 시대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영화가 쏟아지던 정확히 홍콩영화 황금기의 이 영화가 <첨밀밀>이 태어났다. 중화권 최고의 가수 등려군의 노래와 장만옥과 여명이라는 80, 90년대 최고의 홍콩 배우들의 출연으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까지도 <영웅본색>과 더불어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홍콩 작품이다.
<첨밀밀>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 대륙에 있던 자본과 기술자들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홍콩으로 몰려들게 되며, 홍콩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 중 하나가 되는 경제 성장의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소군(여명)과이요(장만옥)가 그러했던 것처럼 많은 중국인이 일종의 “홍콩 드림”을 가지고 홍콩으로 이주했고, 영화는 그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피어오르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어긋나는 두 주인공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개인적으로 고구마를 먹은 듯한 멜로 영화 특유의 답답함이 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내용을 모두 말할 순 없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이전 두 시간의 기다림이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첨밀밀>은 홍콩에서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의 생활을 통해두 남녀 간 사랑의 전개뿐만 아니라, 새로운 꿈을 가지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홍콩에서 “다름”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생으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화 <첨밀밀>은 각박하고 치열한 삶에서 ‘추억’을 볼 수 있는 쉼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지금 새로운 곳에서의 치열한 삶 속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의 ‘추억’을 되돌아보게 해줄 이 영화 <첨밀밀>을 추천한다.
3.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2000)
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화양연화>는 양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집착된 영화로서 1960년대 경제적으로 번창하던 시기의 홍콩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이루어지면 안 되는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차우(양조위) 부부와 첸(장만옥) 부부가 같은 날 이사를 오는 것으로 시작하고, 각자의 배우자들이 숨겨진 불륜을 의심하게 되며 버려지고 쓸쓸한 모습의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우린 그들하곤 다르니까요’ 라는 대사는 어떻게 보면 이 둘 또한 각자의 배우자들과 다름없는 “불륜”을 저지르지만 미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영화의 스토리만 들어본다면 “내로남불”식의 불륜을 전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모든 장면(Scene)에 녹아있는 양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다. 배우를 한 프레임에 보여줄 때 무조건 배우의 얼굴만을 비추지 않고 감독이 나타내고자 하는 선택적인 부분만을 보여주거나, 영화 전반에 걸쳐 변화하는 첸(장만옥)이라는 캐릭터가 차우(양조위)에게 갖는 마음을 치파오의 색의 변화를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화양연화> 역시 양가위 작품 중 정점에 달한 영화라고 꼽힐 만큼 영상미와 음향에 집중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Yumeji’s Theme’이란 곡을 들으면 바로 화양연화가 생각날 정도로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1960년대의 홍콩을 양가위감독의 독특한 색채와 감각적인 장면들로 감상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 <화양연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