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양육 프로그램 관심 높아
한인사회 홍보활동 적극 참여
“유명해진 건 좋은 일 하라는 뜻
소명 알고 걸어가는 이 길 행복”
오만과 편견 사이, 그 어디쯤 그녀가 서 있으리라 짐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라는 행간엔 복잡다단한 편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편견의 대부분은 오만에 관한 것이었다. 뭐 그래도 괜찮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톱스타인데 그 정도쯤이야 당연하다 싶었으니까. 그러나 이 섣부른 편견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여전히 20대 피비 케이츠의 얼굴을 한 그녀는 배우이기 이전에 지천명을 코앞에 둔 커리어 우먼으로서, 삼남매 엄마로서, 이제 막 미국생활에 적응한 유학생으로서 일상의 행복과 고민을 솔직하게 들려줬다.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에 특유의 이국적인 웃음을 덤으로 얹어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는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간간히 마음 찡했고 귀를 쫑긋하게 했고 그리하여 반짝거렸다. 2년 전 유학 와 터스틴에 거주하고 있는 배우 신애라(47)씨를 자택 인근 카페에서 만나봤다.
#스타, 나눔의 아이콘으로
그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90년대를 풍미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다. ‘사랑이 뭐길래’ ‘사랑을 그대 품안에’ 등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드라마에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역할을 맡아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1995년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연애 끝, 차인표(48)씨와 결혼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커플이 됐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배우로서 꾸준히 입지를 다져갔지만 연기 보다 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삶을 통해 보여준 공개 입양과 봉사 등 나눔의 실천이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정민(17), 예은(10), 예진(8) 삼남매를 두고 있다. 이들 중 예은·예진 자매는 2005년과 2008년 이들 부부가 공개 입양한 ‘가슴으로 낳은 딸들’이다. 또 부부는 2005년부터 세계 빈곤아동과 1:1 결연을 맺도록 도와주는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한국컴패션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컴패션 활동 직전 마음이 공허했던 것 같아요. 분명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도 안정적이고 행복했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죠. 그래서 고심 끝 컴패션에서 주최하는 비전트립으로 필리핀에 갔죠. 바로 거기서 만난 아이들이 제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렇게 컴패션을 통해 한명 두 명 늘어난 결연 아동들이 어느새 50여명에 이른다. 이제 그 아이들은 이들 부부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됐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현재 그녀는 코로나 소재 히즈 유니버시티에서 기독교 교육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 똑순이 여사, 당연하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작정한 유학길이지 싶었는데 웬걸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그런 건 아니에요. 이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웃음) 우연히 미국방문 때 현 대학 총장님을 만나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어요. 당시 총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기회가 있을 때 공부를 하라고.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데 그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아니겠냐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반년 만에 유학수속을 밟아 2014년 여름 이곳에 왔죠.”
소명 하나 붙잡고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오른 유학길이었지만 워낙 똑 부러지는 성격과 추진력 탓 2년도 채 안 돼 교육학·기독교상담학·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돌입했다. 이처럼 공부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최근 위탁가정·위탁양육 홍보에도 팔 걷어 부치고 나섰다.
“한국에서 홍보를 열심히 해도 입양 가정 수를 늘리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그런데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을 일정기간 동안 돌보는 위탁가정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는 좀 더 쉽게 실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래서 그녀는 한인사회에도 이 위탁가정 홍보를 위해 지난해 가을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개최한 위탁가정 홍보행사에 직접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해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지난 4월엔 어바인 온누리교회에서 주최한 학부모 세미나의 강사로 나서는 등 지난 2년간 한인사회 교회와 각종단체를 통해 나눔과 교육관련 강연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물론 2년간의 유학생활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공부하랴, 살림하랴, 삼남매 뒷바라지하랴 초창기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미국생활에 완벽 적응 중이다. 여기엔 남편의 공도 컸다. 남편은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으로 건너 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줬다.
#소명 받은 길을 가다
이야기 내내 줄곧 그녀의 초점은 양육법과 위탁가정에 가 꽂혀 있었다. 배우로서의 생활은 더 이상 관심이 없나 싶을 정도다.
“제 평생 직업은 당연히 배우죠. 언젠가 다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엄마 역할을 멋지게 할 날도 오겠죠. 주인공요? 어휴 이만큼 한 것도 감사하죠. 이젠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젊은 날 제가 주인공일 때 여러 선배 연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인생의 절반을 스타로 살아온 여배우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한 한마디에 허를 찔린 이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이 여배우의 반전은 계속된다. 이날 그녀가 들고 온 백팩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셀폰 케이스도, 무심코 꺼내든 장지갑도 모두 명품과는 거리가 먼 평범하다 못해 낡아 해진 것도 있었다.
“저도 한때는 적잖은 금액을 주고 명품 백을 구입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그 핸드백을 들고 간 어느 행사장에서 제가 재킷으로 그 핸드백을 슬쩍 덮어버리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그 명품 백을 부끄러워 한다는 걸요. 그 돈이면 빈곤 아동 몇 명을 더 도울 수 있을 텐데 하는 미안함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론 남의 시선이 아닌 제가 행복한 데로 입고, 들고 해요.”
지천명이란 통과의례 없이도 그녀 이미 하늘의 뜻을 다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
“돌이켜보니 제가 유명해진 데는 그 유명세를 통해 좋은 일을 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 소명 받은 길을 걷고 있으니 행복할 따름이죠.”
코코 샤넬은 말했다. ‘무언가(something)가 아니라 누군가(someone)가 되기로 결정하면 얼마나 많은 걱정을 덜게 되는가’라고. 맞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더 이상의 설명과 수식이 필요 없는 그 누군가가 돼버렸다. 그녀는 신애라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